순례5일차 – 파티마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새벽 6시 미사를 드리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고요한 아침, 만리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길을 따라 발현소 성당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파티마에서 맞이하는 하루는 특별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모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 그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느낍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그리고 사제 성화의 날.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사랑과 희생의 길인지 마음 깊은 곳이 먹먹해 졌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자매님들, 말씀을 봉독하는 자매님들의 모습도 오늘은 유난히 더 거룩하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 머문 복음 말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순례길에서 만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건네시는 따뜻한 초대처럼 느껴졌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품 안에서 쉼을 얻는 것, 그것이 진정한 순례의 의미가 아닐까요.
오늘도 성모님과 함께 걸으며,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웁니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오후에는 파티마의 헝가리 십자가의 길 15처를 돌면서 기도를 바쳤습니다. 공산주의와 무신론의 시대를 지나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고자 헝가리 신자들이 봉헌한 길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올리브 나무 사이로 이어진 돌담길을 천천히 돌며 묵상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한 처 한 처를 향해 걸을 때마다 각자의 삶과 아픔, 감사와 회개가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누구는 가족을 위해, 누구는 자신의 상처를 위해, 또 누구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고, 조용한 평화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어 평화의 천사 발현지로 향했다. 천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 ‘저의 하느님, 당신을 믿고 찬미하며 의지하고 사랑 하나이다.’
그 짧은 기도 안에 신앙의 모든 고백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또한 성체의 기도를 묵상하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하여라’ 라는 천사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순례란 먼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루치아 수녀님의 생가와 성 프란치스코, 성 히야친타의
생가를 방문하고, 세 분이 세례를 받았던 성당에도 들렀습니다. 작은 시골 성당 안에서 잠시 기도하는 동안, 성인들의 거룩함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종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친 뒤 파티마를 떠나 스페인의 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했습니다. 아침 식사 때 식당에 모자를 두고 오셨던 박경옥 마리아 자매님.
첫 휴게소에 도착하자 오히려 환한 미소로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 함께하는 기쁨을 나누는 모습에서 순례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보다 더 따뜻했던 것은 자매님의 밝은 웃음과 넉넉한 마음이었습니다.
긴 이동 끝에 도착한 순례자들의 도시. 산티에고 대성전이 어렴풋이 바라보이는 ‘순례자 언덕’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품고 이곳에 도착했듯이, 우리 역시 은총의 길을 걸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에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그곳에는 우리 한국 제주도와 자매결연을 맺고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 하루방과 조랑말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의 마지막 목적지를 바라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urostars San Lázaro 호텔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티마에서 산티아고까지 이어진 오늘의 순례 여정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